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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왜 새 글자를 만들고, 반대 속에서도 설명을 남겼을까

말과 글 사이의 간격에서 시작해 훈민정음의 해설로 이어진 창제의 과정

핵심 요약

  • 세종 시대 조선 사람들은 우리말로 이야기했지만, 글을 쓰는 일은 한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 말할 수 있는 것과 자신의 뜻을 글로 남길 수 있는 것 사이에 간격이 있었다.

세종 시대 조선 사람들은 우리말로 이야기했지만, 글을 쓰는 일은 한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말할 수 있는 것과 자신의 뜻을 글로 남길 수 있는 것 사이에 간격이 있었다. 세종이 새 문자를 만든 출발점은 이 문제였다. 1446년 『훈민정음』에 실린 왕의 머리말은 백성이 뜻을 충분히 표현하기 어렵다는 사정을 밝히고, 새 글자를 쉽게 배워 일상에 쓰게 하려 했다고 설명한다. 『세종실록』 1446년 음력 9월 기록

새 글자를 고안하는 일은 그 간격을 줄일 첫걸음이었다. 조정에서는 기존의 문자와 학문 질서가 흔들릴 것이라는 반대가 나왔고, 왕은 백성의 편리함을 들어 맞섰다. 1443년 스물여덟 글자로 출발한 한글의 역사는 그래서 발명의 순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문자를 만들고, 쓰게 하고,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과정까지 살펴야 한다.

1443년, 우리말을 적을 새 도구가 등장했다

새 문자 이전에도 한자를 응용해 우리말을 적는 이두·구결·향찰 등의 방식은 있었다. 그러나 국립한글박물관의 전시 해설에 따르면 한자를 익힌 일부 계층 밖의 많은 사람에게 읽고 쓰기는 여전히 어려운 일이었다. 세종이 해결하려 한 것은 말의 부재가 아니라, 그 말을 글로 표현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이었다. 국립한글박물관 창제 배경 해설

『세종실록』의 1443년 음력 12월 기사에는 임금이 직접 언문 28자를 만들었으며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초성·중성·종성을 합해 글자를 이룬다는 설명도 담겼다. 말의 소리를 작은 요소로 나누고 다시 묶어 적을 수 있는 체계가 등장한 것이다. 『세종실록』 102권

이듬해 음력 2월 16일, 세종은 최항·박팽년·신숙주 등에게 《운회》를 언문으로 옮기도록 명했다. 세자와 진양대군·안평대군이 일을 관장하고 왕의 판단을 받게 했다. 새 글자는 이제 왕이 만들었다는 기록을 넘어 학자와 왕실이 실제 작업에 사용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세종실록』 1444년 음력 2월 16일

1444년, 배우기 쉬운 글자에 반대가 나온 까닭

나흘 뒤인 음력 2월 20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반대 상소를 올렸다. 중국의 문자와 제도를 따르던 조선이 별도의 문자를 만드는 것은 기존 질서에서 벗어난다는 주장이었다. 쉬운 언문으로도 일을 할 수 있게 되면 관리들이 한문과 성리학을 배우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담았다. 최만리 등의 상소와 세종의 답변

같은 특징을 두고 평가가 갈린 셈이다. 세종에게 쉽게 배운다는 것은 더 많은 백성이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반대하는 신하들에게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익혀온 학문을 덜 배우게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논쟁의 중심에는 글자를 얼마나 정교하게 만들었는가뿐 아니라, 사람들이 무엇을 배우고 어떤 문자로 일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있었다.

상소는 재판에서 생기는 억울함도 다뤘다. 백성의 말을 새 글자로 적어 읽어주면 도움이 된다는 주장에 맞서, 최만리 등은 글을 알아도 매를 견디지 못해 거짓으로 자백하는 사람이 있다고 반박했다. 재판의 공정함은 관리에게 달렸다는 논리였다. 글자의 필요성을 둘러싼 논쟁이 백성의 구체적인 생활 문제에까지 닿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세종이 내세운 기준은 백성의 편리함이었다

세종은 이미 쓰던 이두를 들어 반박했다. 이두를 만든 목적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는 것이었다면 새 언문도 같은 기준으로 볼 수 있다는 취지였다. 새 문자를 옹호하는 왕과 반대하는 신하들의 대화는, 익숙한 문자 질서를 유지하는 일과 글을 쓰기 어려운 사람의 불편을 줄이는 일 가운데 무엇을 앞에 둘 것인지 드러낸다.

갈등은 실제 처분으로 이어졌다. 최만리 등은 의금부에 내려졌고 다음 날 석방 명령이 났다. 정창손은 파직됐으며 김문에게는 앞뒤로 말을 바꾼 사유를 조사하라는 명령이 따랐다. 실록에 남은 이 과정은 새 문자가 조정의 일치된 환영 속에 세상에 나온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1446년, 다른 사람이 배울 수 있도록 설명하다

반대 논쟁 뒤에도 새 문자에 관한 작업은 이어졌다. 1446년 음력 9월 실록에는 『훈민정음』이 이루어졌다는 기록과 함께 세종의 글, 글자를 쓰는 방법, 정인지의 서문이 실렸다. 문자의 필요성을 밝히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소리와 글자 배치의 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세종실록』 113권

정인지의 서문은 왕의 명에 따라 자신과 최항·박팽년·신숙주·성삼문 등 학자들이 해석과 용례를 썼다고 전한다. 새 글자를 만든 사람의 지식을 다른 사람이 익힐 수 있도록 풀어내는 일이었다. 국립한글박물관도 1443년의 문자 창제와 1446년의 목적·원리를 밝힌 책의 제작을 구분해 설명한다. 오늘 반포를 기념하는 한글날 뒤에는 이 설명의 작업이 놓여 있다.

오늘 다른 언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이 한글을 배워 처음 자기 뜻을 적는 순간에도 이 역사를 떠올릴 수 있다. 한글을 기념하는 이유는 오래된 발명을 보존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말하고 싶었던 사람이 글로 뜻을 전할 수 있도록 하려 했던 선택, 그리고 처음 접하는 사람도 배울 수 있게 설명하려 했던 작업이 지금의 읽고 쓰기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방문 참고 · 여주 영릉

세종과 소헌왕후를 모신 여주 영릉(英陵)에 관심이 이어진다면 궁능유적본부 왕릉 안내와 여주세종문화관광재단의 한글날 문화행사 안내를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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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주 기자 · lcj3117@gea.s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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